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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의 요구, 이재명 정부 중대한 시험대. (사진: 미디어코리아DB) |
호르무즈 해협 파병 문제가 이재명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중대한 시험대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군사적 기여를 공개적으로 압박하면서 정부가 P-8A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 등 군사자산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청와대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가 검토하는 방향 역시 이란과의 전투 참여가 아니라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자유와 해상교통로 안전 확보에 무게가 실려 있다.
문제는 이번 선택을 단순히 ‘한미동맹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분법으로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호르무즈는 미국만의 바다가 아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60% 이상이 이 해협을 통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협이 장기간 봉쇄되거나 통항이 불안해질 경우 국제유가 상승과 운송비 증가, 물가와 기업 생산비 부담으로 직결된다. 최근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상품 운반선도 크게 감소했고 브렌트유는 배럴당 90달러 후반까지 올라섰다. 결국 항행의 자유는 한국 스스로에게도 중요한 경제안보 문제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와 한국의 국익을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중간선거 앞둔 트럼프…한국이 그의 시간표를 따를 이유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태도에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배경에는 한미동맹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오는 11월 3일 중간선거를 치른다. 최근 Reuters/Ipsos 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33%에 머물러 정치 경력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이란 군사행동을 지지한다는 응답도 31%에 그쳤다. 경제와 생활비 문제에 대한 불만도 커지면서 공화당에는 중간선거를 앞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 주목할 부분은 전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2일 재개된 대이란 군사행동에 대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미·이란 충돌은 이미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으며 호르무즈 통항 불안과 유가 상승이라는 비용은 미국 소비자에게도 돌아가고 있다. 미 행정부 내부에서도 중간선거 이전까지 전쟁을 크게 확대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다’는 정치적 약속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 간극이 생긴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이란과의 협상을 두고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이는 한국을 향한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시간 압박 속에 몰아넣고 강한 요구를 제시한 뒤 협상 과정에서 조건을 조정하는 트럼프식 협상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관세정책에서도 비슷한 모습은 반복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대규모 상호관세를 발표했다가 금융시장이 흔들리자 일부 관세에 90일 유예조치를 내놨다. 최근에는 캐나다와의 무역갈등을 다시 확대하는 등 국가별·품목별 조건을 바꾸며 압박과 협상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큰 방향은 일관되지만 그 실행수단은 상황과 협상 상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어왔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필요한 시간이 곧 대한민국이 움직여야 할 시간이 될 이유는 없다.
이라크 파병이 남긴 두 개의 기억
한국은 이미 비슷한 선택을 경험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자이툰부대를 파견했다. 당시 파병 규모는 3천여 명으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상당한 규모였다. 정부가 밝힌 명분은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재건지원이었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이툰부대는 4년 3개월 동안 학교와 보건소, 관개시설 등 260여 개 시설을 건설했고 의료·기술교육과 지역 재건사업을 수행했다. 연인원 약 1만9천500명의 장병이 임무에 참여했다. 파병은 한미관계를 관리하는 데에도 일정한 외교·안보적 자산으로 기능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파병=경제적 국익’이라는 공식이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다.
당시 현지 취재에서도 자이툰부대 주둔과 한국 기업의 유전개발 등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파병에는 상당한 정부 재정이 들어갔고 국내에서는 파병의 정당성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다. 2004년 한국인 김선일씨가 납치·살해됐을 당시 무장단체가 한국군 철수와 추가파병 중단을 요구하면서 해외파병이 국민의 안전 문제로까지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도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라크 경험이 현재 한국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동맹이 요구하니 파병한다’도 정답이 아니며 ‘전쟁이 위험하니 무조건 거부한다’ 역시 충분한 국가전략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속도 조절’은 평가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이재명 정부가 지금까지 호르무즈 문제에서 즉답을 피하고 여러 선택지를 검토해온 것은 일정 부분 합리적인 접근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과거 한미 관세협상에서도 한국 정부는 미국이 처음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협상을 이어가며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3천500억 달러 대미투자 가운데 2천억 달러의 현금투자에는 연간 200억 달러의 상한을 두는 안전장치를 확보했다. 쌀과 쇠고기 시장의 추가 개방도 막았다.
압박이 강하다고 즉각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이용해 조건을 조정한 사례다.
호르무즈에서도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중함과 우유부단은 다르다. 지난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호르무즈 군함 파견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55%, 찬성이 30%였다. 최근 조사에서는 정부 대응 자체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결정을 미룰수록 국민에게 ‘왜 보내야 하는지’, 또는 ‘왜 보내지 않아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할 책임은 오히려 커진다.
더 위험한 변수는 이란이다
미국만 바라보고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있다.
이란 외교부는 한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해 심각한 결과를 경고하고 있으며 이란 측 고위 관계자는 한국군의 호르무즈 개입을 전쟁 참여로 간주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한국이 해상초계기 한 대를 보내는 행위와 이란을 공격하는 행위는 군사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상대가 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파병을 결정한다면 임무의 범위를 더욱 선명하게 설정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대이란 군사작전에 편입되는 방식보다는 영국·프랑스 등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다국적 체제 아래 △민간선박 보호 △기뢰 제거 △수색·감시 △군수지원 등 비공세적 임무로 한정하는 방안이 상대적으로 위험을 낮출 수 있다. 한국은 이미 프랑스 등과 호르무즈 항행 자유를 위한 국제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또 파병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헌법 제60조 제2항은 국군의 외국 파견에 대해 국회의 동의권을 명시하고 있다. 국민적 설명과 국회 논의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파병한다면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이 있다
결국 질문은 ‘미국을 도울 것인가’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먼저다.
한국이 호르무즈의 항행 자유를 위해 실제 군사적 위험과 정치적 부담을 떠안는다면 그것을 단순한 동맹의 의무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한미 간에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핵추진잠수함, 반도체 관세, 대미투자, 북핵 문제 등 한국의 안보와 산업에 직결된 협상 현안이 적지 않다.
파병을 협상의 대가로 거래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동맹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상호 기여로 유지된다. 한국이 국제 안보의 부담을 나눈다면 미국 역시 한국이 필요로 하는 안보와 경제적 요구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이것이 2004년 이라크 파병과 2026년 호르무즈 선택이 달라져야 하는 지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난하는 것만으로 한국의 국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요구를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동맹의 증거도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압박에 흔들리지 않는 계산이다.
지금까지 이재명 정부가 즉각적인 파병 결정을 피하고 군사·비군사적 선택지와 국제공조 방안을 동시에 검토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평가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최종 결정에서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첫째는 우리 장병과 국민의 안전, 둘째는 에너지 안보와 경제적 국익, 셋째는 한미동맹, 넷째는 이란을 포함한 중동 국가와의 관계, 마지막은 파병 이후 한국이 감당해야 할 장기적 책임이다.
트럼프에게는 11월 중간선거라는 정치적 시계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에는 그보다 훨씬 긴 시계가 필요하다.
압박이 강할수록 서두르는 것이 외교가 아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계산한 뒤 움직이는 것, 그것이 결국 국익 중심 외교다.
기사작성: 미디어코리아 박상찬 기자 mknews114@gmail.com
